가장 소중한 추억
FF14 6.0 효월의 종언 스포일러
알반 마티아스는 여행객이자 모험가였다. 지나가듯이 듣기론 동부 커르다스 출신으로 지금은 고향을 떠나 에오르제아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부족한 여행 경비는 모험가 길드의 온갖 의뢰를 받아 충당하는데, 발도 넓고 오지랖도 넓은 편이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꼭 의뢰가 아니더라도 손을 거들고는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활에 얹혀 마구잡이로 끌려 다니는 신세의 차슬로는, 커다란 도끼를 짊어진 알반이 뛰어드는 대로 환술봉을 치켜드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뉘엿뉘엿 해가 기울던 저녁, 야영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알반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예리하고 멀리 보는 그의 눈은 두 사람의 뒤쪽에 고정된 채였다. 그들이 삼십 분쯤 전에 지나쳐온 곳으로, 운이 나쁜 한 상인이 길을 점령한 늪지도마뱀 떼에 발이 묶여 동동거리고 있었다. 차슬로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약간의 불안감을 느끼고 제 동행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알반은 이미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면서 저만치 길을 돌아간 뒤였다. 결국 두 사람은 저녁까지 미뤄둔 채 때 아닌 도마뱀 토벌 작전을 벌여야 했다.
도마뱀을 모두 몰아내고 나니 어느새 하늘이 어두컴컴한 한밤중이었다. 상인이 감사의 표시로 내미는 약간의 길과 포도주 한 병까지 받아 든 두 사람은 근처 평지에 불을 피웠다. 바로 아까 떠나온 청동호수 야영지가 멀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가서 방을 잡기에는 남은 여비가 아슬아슬했다. 차슬로나 알반이나 잠자리에 예민한 이들은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뒤늦은 저녁 식사로 쏠렸다. 알반은 잘 손질된 도마뱀 고기를 꼬치에 끼워 불 옆에 세워 두고는, 지체하지 않고 보수로 받은 포도주를 땄다.
“이야, 이런 의뢰의 보수로 받기엔 나쁘지 않은 술인데. 너도 마실래?”
“아뇨.”
고개를 흔들면서 차슬로가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주물렀다. 지친 몸을 앉혀 불을 쐬었더니, 갑작스러운 전투로 경직되었던 몸이 그제야 풀리는 듯했다. 알반이 그 모습을 보면서 킬킬거렸다. 그 손에는 어느새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도마뱀 구이가 들려 있었다.
“인마, 넌 한 대도 안 맞았잖아. 그 늪지도마뱀 점액이 얼마나 짜증나는지도 모르면서 불평은.”
“대신 당신이 맞은 걸 죄다 치료해 놔야 했잖아요. 나 참, 적당히 좀 피하라니까….”
“아니, 말도 못하는 도마뱀이 뭔 공격을 할지 내가 어떻게 아냐?”
차슬로는 대꾸 대신 툴툴거렸다. 모험가라면서 기억상실자보다 예측을 못 하면 대체 어떻게 다니려는 건지. 결국 그 피해를 치료하는 건 전부 자신의 몫이 아닌가. 치유하는 것이 힘에 부쳐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고, 다만 보다 덜 아프게 일을 처리할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모험가인 알반이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손에 든 나무 꼬치가 못마땅하다는 듯 까딱거렸다.
“그걸 때려맞춰서 피하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 야, 솔직히 말해 봐라.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는 거 거짓말이지? 사실 어디서 훈련받은 정예 요원, 뭐 그런 거 맞지?”
“저한테 물으셔도 모른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는데요.”
“어휴, 내가 커얼 새끼를 키웠지, 아주.”
어깨를 으쓱인 차슬로가 웃음을 터뜨리고, 마찬가지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린 알반이 또 다른 도마뱀 꼬치를 집어 들었다.
알반의 동행인은 덩치에 비해 식욕이 없는 편이었다. 격한 전투를 치른 날이면 더욱 식욕이 없다며 마다하기 일쑤라, 그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 생각이냐고 타박한 게 몇 번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먹겠다는 사람을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알반이 손에 든 꼬치를 흔들었다. 더 먹으라는 뜻이었지만 차슬로는 좀 이따 먹겠다며 손을 내저었다. 대신 모닥불에 좀 더 가까이 몸을 당겨 앉았다.
한순간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도마뱀 꼬치는 아직 남았고 알반은 아직 배가 고팠으니 원인은 차슬로였다.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게 무색하게도 그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불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 하고 고기를 크게 뜯어 삼킨 알반이 손가락을 튕겨 주의를 끌었다. 차슬로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데?”
“별 일 아니에요.”
“내가 그 얘기 안 해줬나? 예전 파티에서 그렇게 말 안 하고 며칠 뭉개더니 결국 딜러 둘이 사랑의 도피 했다는 이야기.”
“…그건 처음 듣는데요? 멱살 잡고 싸운 거 아니었어요?”
“그건 그 다음… 아니, 다다음인가? 아무튼 다른 파티였어. 둘 중 하나하고 힐러하고 사귀는 사이라고 했었는데 말이지.”
우와. 차슬로가 혀를 내둘렀다. 한층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알반이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우리 둘이니까 네가 그러면 큰일 난다?”
“안 그러거든요? 아니, 정말 별 일 아니라니까….”
“아, 그래서 진짜 뭔데? 아까 도마뱀 한 마리가 네 쪽으로 달려들었던 거? 그건 미안. 내가 좀 더 신경썼어야….”
“그런 거 아녜요.”
차슬로가 신경질적으로 손에 든 꼬치를 던졌다.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막대가 어둠에 잠긴 수풀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 별 것 아니에요. 그냥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거 아닌가 해서요. 오늘도 그 상인을 보고 가던 길까지 돌아가서는 도마뱀을 다 잡아줬잖아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조용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알반은 한참 말이 없었고, 그건 차슬로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을 견디다 못한 차슬로가 역시 저녁 자리에서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며 고개를 흔들려던 차에 알반이 입을 열었다.
“음, 진짜 큰 이유는 아냐. 그냥, 재밌잖아. 내 개인적인 목표도 있고.”
“목표?”
“잊히지 않는 거야.”
말로 표현하려니 쉽지 않네. 멋쩍은 얼굴로 목덜미를 쓸어내리면서 알반이 말을 이었다.
“세상을 구한 영웅이라도, 가장 눈부셨던 문명이라도… 세대를 거듭하고 세기를 건너다 보면 잊히기 마련이니까. 그런 것들은 오로지 사람의 기억과 기록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거든.”
모험하다 보면 그런 걸 많이 봐. 잊힌 유적, 잔해,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태어나는 마물들…. 차슬로는 나직이 이야기하는 알반의 얼굴이 짙은 피로감으로 물들어 있다고 느꼈다. 눈 아래를 거뭇거뭇하게 물들이는 것과는 달랐다. 긴 시간 동안 사람의 정신을 좀먹고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쌓여 온 종류의 피로.
“그래서 많은 곳을 여행하고, 많은 사람을 구하고, 더 많은 기록을 남겨서 어떻게든 나라는 사람이 존재했다는 기억을 남기고 싶어. 잊히기 싫으니까.”
그는 깊이도 연원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차슬로는 잠시 말을 잃었다가, 침을 한번 삼켰다. 어쩌면 이제껏 보여준 적도, 드러낸 적도 없는 이 모습이야말로 그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슨 그런 소원이 다 있어요?”
“역시 좀 이상한가? 그치만 뭐 어때! 자, 생각해봐. 오늘 전투는 힘들었지만 라노시아 지역에서 기록할 만한 거리가 하나 더 생겼잖
아. 굳이 이름 붙이자면 얻어 먹은 술과 도마뱀 구이의 추억 정도? 그 상인도 우릴 기억할 테고 말야.”
그러면서 포도주 병을 높이 들어 올렸다. 조금 전 얼굴을 스쳤던 환멸은 어느새 씼은 듯이 자취를 감췄다. 너도 맛이라도 좀 보라며 다시 권하는 얼굴엔 평소와 다름없는 쾌활함만이 남아 있었다. 차슬로는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한 잔을 다 비우고 나니 알반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다 알겠다는 듯이.
“진짜 묻고 싶었던 건 따로 있지?”
“…절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 이유에서에요? 아무리 치유사라지만 짐이 하나 더 있는 셈이잖아요. 성가실 것 같은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반은 푸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는다. 짐이래, 짐! 나름 진지하게 꺼낸 이야기인지라 차슬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 진지한데요.”
“아, 알았어, 알았어. 미안. 글쎄다…뭐, 비슷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잔을 내린 알반이 고개를 뒤로 젖혀 하늘을 올려다본다. 보랏빛 눈 위로 은하수가 어른거린다. 마법처럼.
“난 전투가 끝난 뒤에 덜 아파서 좋고, 넌 경험을 쌓을 수 있으니까 좋고. 겸사겸사지. 얼마 전까지의 기억이 전부 사라진 놈을 주워다 이렇게까지 먹이고 키웠는데 설마 날 홀라당 잊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있고…. 무엇보다 네가 살아남길 바라니까. ”
“죽을 생각은 없는데요. 그렇게까지 힘든 것도 아니고.”
“안 그럴걸. 생각보다 중요하거든, 기억이란 건. 기억이야말로 이 세상이 유지되는 동력이자 사람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지. 사람이 살아가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이기도 하고. 두고 봐, 언젠가는 그런 기억들이 네가 살아갈 원동력이 될 테니까.”
“…진짜 의미를 모르겠네….”
“아, 너무 그러지 말고. 언젠간 나한테 고마워할 날이 올걸? 내가 보기엔 너도 완전 모험가 체질이야. 몇 년만 지나 봐라.”
그 날이 오면 내가 술 한잔 산다! 다시 병을 치켜들면서 알반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는 정말 이상한 여행객이자 모험가였다. 정말 이상하고 대책도 없고. 이상한 목표나 남한테 들이대면서 늘상 피곤하게 살다가 결국엔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빛의 전사.
별이 쏟아질 듯 아슬한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새벽을 닮은 보랏빛이 세상 위로 드리웠다. 힘없이 드러누운 채로 차슬로가 눈을 가렸다. 이제는 꽤 오래된 기억이고 그가 사 주는 술도 영영 마실 수 없게 되었지만, 온갖 기억들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말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도 없는 우주의 끝, 절망을 쌓아 만든 행성에서 길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이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 힘은 앞에 있지 않다. 목표가 사람을 미래로 이끈다면 기억은 지금을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그의 뒤에서 붙잡아 주었던 것들과 그가 두고 떠나온 것들, 웃으며 작별하던 그 얼굴들… 그 모든 것에 쌓인 수많은 기억들이, 무수한 마음이 그의 등을 받치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마음이 움직인다. 반드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그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앞으로도,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가장 간절한 희망을 담아, 가장 소중한 추억을 담아.